[문화] 환상과 비판 사이: '게임적 세계관'의 해체와 게임 비평의 가능성
소위 '이대남'의 정치·사회적 행동양태를 설명하는 '게임적 세계관'이라는 분석이 최근 유행이다. 그러나 게임적 세계관은 정말 실존하는가? 게이머이자 활동가의 시각에서, 게임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넘어선 진보·좌파적 게임 비평의 필요성을 되짚는다.
'게임적 세계관'이라는 환상
최근 비상계엄과 내란 사태 이후로 다양한 미디어들이 세대·젠더에 따른 정치적 양극화를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2030 남성 세대 - 특히 이른바 '이대남'이라는 수식어로 규정되는 이들의 정치적 성향과 행동양식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게임적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이 주목받고 있는데, 이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이들의 세계관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적지 않은 수의 20대 남성들이 이른바 '롤대남'이라는 수식어로 지칭되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분석은 일정한 사회적 소구력을 갖는다. 박한슬 작가가 게임 전문 언론 ‘디스이즈게임’에 작성한 『"게임 모르는 상사는 도태된다"… MZ 직원들의 비밀』 이나 김민하 작가(필명 '이상한 모자')의 글인 『이대남의 게임적 세계관』 에서 이러한 세계관 제시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분석은 주로 게임의 핵심 요소인 '공정성', '보상성', '경쟁성' 등이 이들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실제로 이러한 요소들은 게임의 기획과 설계 과정에서 지속가능성과 몰입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기에, 이러한 설명은 일견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첫째, '이대남의 게임적 세계관'은 매체결정론적 환원주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등장이 인간관계를 파괴했다" 혹은 "텔레비전이 독서문화를 망쳤다"는 주장처럼, 복잡한 사회변화를 단순한 매체와 기술 발전으로 설명하려는 성급함이 엿보인다. 만약 '게임적 세계관'이 가능하다면, '영화적 세계관'이나 '쇼츠 세계관'은 왜 불가능하겠는가? '게임적 세계관'은 이대남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맥락과 게임이라는 매체가 세대와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양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매체의 특성과 그것이 사회문화적 맥락과 교차하는 지점들은 게임비평이라는 전문적 영역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할 문제다.
둘째, 한국 사회에는 이미 게임적 세계관의 핵심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보다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 시스템이 존재한다. 바로 '시험'이다. 김민하 작가는 게임의 '능력치' 개념을 통해 이대남의 세계관을 설명하지만, 이는 수능, 정규직 시험, 공무원 시험이라는 게임보다 더 오래되고 자본주의와 통치성을 교류해온 능력주의 시스템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히려 게임은 현재의 '이대남'을 만들어낸 생성자가 아니라, 이들이 신자유주의적 경쟁 구조에서 찾은 일종의 대리체험의 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미 능력주의, 신자유주의적 세상에 대한 인식을 내면화한 세대가 게임 속에서 이러한 메커니즘을 반복하며 위안적 보상을 얻었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들의 공정성 추구와 능력주의적 성향은 한국 사회의 교육체계와 노동시장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시험적 세계관'이라는 개념은 입시 중심의 교육체계, 스펙 경쟁이 일상화된 취업 시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가치체계라는 구조적 조건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
한편, 게임적 세계관론이 설득력을 얻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수성에 대한 오랜 오해에 기반한다. 게임이 다른 레거시 매체와 달리 '실제 조작을 통한 주체적 향유'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높은 몰입도와 매체적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흔히 이야기되던 '게임이 폭력성을 조장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 비록 수많은 연구들이 이미 게임과 폭력성의 상관관계가 없거나 극히 미미하다고 밝혔음에도, 이러한 통념은 셧다운제와 같은 게임 규제 정책의 근거가 되어 왔다. 그러나 게임이 지닌 진정한 특수성과 한계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게임의 규칙과 시스템을 통해 현실을 재현하고 비판하려는 '절차적 수사학(procedura rethoric)'의 가능성과, 동시에 이러한 시도가 게임의 재미 요소나 중독성에 압도되어 무력화될 수 있다는 '루도내러티브 디소넌스(Ludonarrative dissonance)'의 위험이다. 1
게임의 '절차적 수사학'과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게임의 의미 전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게임 연구의 오랜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게임학이 하나의 학문 분야로 자리 잡기 전, 연구자들은 게임의 본질이 이야기(서사, narrative)에 있는지, 아니면 놀이(루돌로지, ludology)에 있는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한 쪽에서는 게임을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텔링 매체로 보았다. 이들은 게임이 소설이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이며, 다만 플레이어의 상호작용을 통해 더욱 풍부한 서사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나 <레드 데드 리뎀션> 같은 게임들이 보여주듯, 게임은 복잡한 스토리와 캐릭터, 세계관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게임만의 독자적인 놀이 형식과 규칙에 주목했다. 이들은 게임의 핵심이 이야기가 아닌 플레이어의 상호작용과 선택,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규칙 체계에 있다고 보았다. <테트리스>나 <문명> 시리즈처럼 뚜렷한 서사 없이도 게임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이러한 규칙 기반의 상호작용이야말로 게임만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맥락에서 철학자이자 게임 연구자인 이안 보고스트는 '절차적 수사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이는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논쟁을 유도하는 기술"로, 게임이 규칙과 시스템을 통해 현실을 재현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예컨대 입국 심사관 시뮬레이션 게임 <페이퍼스, 플리즈>는 관료제의 비인간성을 게임의 규칙으로 번역한다. 플레이어는 가상의 독재 국가에서 입국 심사관이 되어 난민, 정치적 망명자, 이산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의 입국을 심사한다. 게임은 제한된 시간 안에 더 많은 사람을 심사하도록 압박하고, 실수할 경우 급여를 삭감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를 몰아세운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플레이어는 인도주의적 판단과 규칙 준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서류가 미비한 난민을 거절해야 할 때, 위조 서류를 들고 온 이산가족을 마주할 때, 플레이어는 관료제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비윤리적 선택의 순간들을 직접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출시되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팰월드>는 이러한 절차적 수사학의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얼핏 보면 <포켓몬스터>와 비슷한 몬스터 수집 육성 게임으로 보이지만, 이 게임은 자본주의적 생산 시스템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플레이어는 '팰'이라 불리는 몬스터들을 포획해 노동력으로 활용하고, 심지어 도축해 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게임의 성장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플레이어를 이러한 선택으로 이끈다. 이는 단순한 충격 효과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산업적 축산과 노동 착취의 시스템을 게임의 형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보고스트는 이처럼 게임이 현실의 시스템을 규칙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현실의 메커니즘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게임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볼 때, 이안 보고스트가 주장한 '절차적 수사학'을 통한 현실 비판의 가능성은 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제한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nance)', 즉 게임 서사와 놀이 간의 부조화라는 근본적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2007년 게임 디자이너 클린트 호킹이 <바이오쇼크>를 비평하며 제시한 이 개념은, 다시금 반복되는 게임의 서사(narrative)와 플레이(ludus) 사이의 모순을 지적한다. 가령 폭력이나 전쟁을 비판하는 서사를 가진 게임이 정작 플레이어에게 끊임없는 살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는 특히 <콜 오브 듀티> 시리즈같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영화에 비견되는 AAA급 게임들, 즉 거대 자본과 수백 명의 개발 인력이 투입되는 대형 상업 게임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문제다. 게임 웹진 폴리곤이 지적했듯이, "게이머들에게 애초에 학살을 통해서 재미를 느끼도록 설계한 게임을 판매해 놓고 그것을 구입한 플레이어에게 도리어 '왜 폭력을 중시하는 것이냐'라고 비판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2 3
<팰월드>의 사례를 다시 돌아보자. 많은 플레이어들은 게임이 재현하는 시스템의 비윤리성을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즐긴다. 게임 속 팰들에 대한 착취와 도축이 유튜브 콘텐츠의 소재가 되고,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일상적인 게임 플레이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유튜브에는 가장 효율적으로 팰들을 배치하여 적절한 ‘노동착취’를 할 수 있는 팁들이 인기 영상이다. 이는 절차적 수사학이 갖는 한계를 보여준다. 게임이 현실의 시스템을 재현하고 비판하려 해도, 그것이 게임의 재미 요소로 환원되면서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는 시스템을 자연화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게임적 세계관'에 대한 우려가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게임은 분명 현실을 비판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매체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게임이라는 형식으로 전달될 때에는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게임을 단순히 세계관을 규정하는 매체로 보거나, 혹은 반대로 현실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과 맺는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대안적 게임 비평을 향하여
게임적 세계관은 분명히 환상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게임 매체가 드리워 온 그림자를 명확히 지목하고 있다. 게임 매체가 반복-재현하는 현실의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2030 남성들의 커뮤니티에서 재생산되는 '유독한 가부장제(toxic patriarchy)', 이를 다시 반영한 게임 산업자본의 암울한 노동환경까지. 그럼에도 여전히 게임은 단순히 이용자들의 세계관을 규정하는 매체가 아니라, 현실의 시스템을 재현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잠재력과 동시에 그러한 비판이 게임의 재미 요소로 환원되어 무력화될 수 있는 위험을 함께 지닌 복합적 매체다. 결국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평적 실천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된다.
『GG Vol. 1』에 게재된 『한국 게임 비평의 궤적과 방향』(강신규, 2021.06.10)은 게임 매체의 '불완전성'에 주목하며 게임 비평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한다. 강신규는 게임이 기존 레거시 매체와 달리 완성된 형태로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게임은 플레이어의 참여와 상호작용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불완전한 텍스트'이며, 이러한 특성은 게임 비평의 고유한 과제를 만들어낸다. 게임 비평에서는 텍스트 자체의 분석뿐 아니라 플레이어의 참여 경험, 플랫폼과 장르별 특성, 그리고 게임 커뮤니티의 집단적 경험까지 포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관점에서, 진보·좌파적이고 독립적인 게임 비평도 역시 시도해 볼 수 있다. 이런 시도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지닌 잠재력, 게임 커뮤니티를 통해 구성되는 여론, 그리고 게임 자체가 내포한 자본주의적 기획을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자본과 유저층 사이의 중재자적 역할을 수행하며, AAA급 상업 게임들이 보여주는 한계를 넘어선 대안적 게임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게임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통해 드러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포착하고 이를 변화의 동력으로 전환하는 실천이 될 것이다.
최근 들려온 뜨거운 소식을 공유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2020년 발매되어 엄청난 평단과 게이머들의 찬사를 받은 <디스코 엘리시움(Disco Elysium)>의 개발진들이 경영진과의 갈등 끝에 새롭게 차린 게임 스튜디오 '서머 이터널(Summer Eternal)'의 선언문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주요 작가들과 개발진은 구 소련 국가였던 에스토니아 출신이며 사회주의자임을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게임 내에 그들의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인류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장 젊은 매체가 지닌 변화의 잠재성"에 주목하는 서머 이터널의 선언처럼, 더 많은 개발진들이 대안적이고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게이머들이 있는 그대로 그것을 향유할 수 있길 바란다.
최상희
현 정의당 강원도당 사무처장,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
최근까지 전환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지역운동, 지역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다.
게임을 즐긴다.
참고문헌
- 이정엽(2017), 「이안 보고스트의 설득적 게임 방법론 연구」, 『대중서사연구』 23(3).
- 고민선(2024), 「비디오게임 연구의 지형도 비판적 비디오게임 연구의 가능성을 위하여」, 『인문논총』 81(4), pp.345-382.
각주
- 스탠포드가 82개 의학논문 검토 후 증명한 '게임과 폭력성'의 인과 관계는? https://www.thisisgame.com/webzine/pds/nboard/267/?category=1&n=170374 [본문으로]
- 자각몽으로서 게임: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4c4731e3-58be-4dab-9a3d-973f6709cde5 [본문으로]
- https://www.polygon.com/2020/6/26/21304642/the-last-of-us-2-violenc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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