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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음악

움직임과 직관의 변주: QWER과 <나는 반딧불>의 시간 미학

by Domoleft 2025. 5. 7.

[문화] 움직임과 직관의 변주: QWER과 <나는 반딧불>의 시간 미학

최근 대중음악계를 달구고 있는 밴드 QWER과 가수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 리메이크. 한국 사회는 왜 이들의 노래에 열광하는가? 지역에서 청년 문제를 고민하는 관악의 진보정치인 왕복근이 개인이 아닌 '우리'의 서사로서, 그리고 우리 시대 청년들의 '시간 미학'으로서 이들의 노래가 갖는 의미를 살펴본다.


 

시간은 정직하지 않다. 같은 시간이더라도 사는 법은 다양하다. 밴드 QWER에 대한 열광과 황가람의 리메이크곡 <나는 반딧불>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보며, 음악이란 가장 직접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몇 분 몇 초로 계량화된 시간 속에서, 계량화될 수 없는 무언가를 담아내는 마법 같은 예술. 그래서 이들에 대한 열광과 공감이 우리 시대에 공존하는 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를 넘어 한국 청년들이 살아가는 '시간의 미학'을 보여 주고 있다.


QWER - '도착하지 않는 운동'

공연 중인 QWER. 출처: 뉴스1

 

밴드 QWER에게는 '완료형' 시제가 없다. 그들은 언제나 '진행 중'이다. 데뷔곡 <Discord>부터 최신작 <청춘서약>까지, 그들의 음악은 완결이 아닌 과정 그 자체를 노래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콘셉트가 아닌 내면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질적 시간에 대한 음악적 응답이자, 그들의 실존적 여정을 반영한다.

 

인터넷 유명인들의 기묘한 조합으로 시작된 QWER. 인터넷 방송인 쵸단과 마젠타, 틱토커 히나, 그리고 전 일본 아이돌 이시연. 이들의 출발은 서브컬처의 문법 안에 있었다. 이들의 등장은 '연습생'이라는 K-POP의 문법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K-POP이 '완성된 후 등장'이라는 서사를 취한다면, QWER은 '불완전한 채로 등장해 함께 성장하는' 서사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오히려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실력을 향상시키는 과정, 그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솔직함이 역설적으로 진정성을 부여했다. 쵸단의 드럼 필인 연습, 마젠타의 '연습 벌레'라는 별명, 히나의 건초염이 생길 정도의 기타 연습, 시연의 매일 같은 녹음. 이는 가짜가 진짜가 되어 가는 과정, 혹은 가짜와 진짜의 경계를 허무는 여정이었다.

 

QWER의 서사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운동하고 있는 흐름 같다. QWER의 음악 역시 '결과물'이 아닌 '과정' 자체를 음악화한다. 그들의 '가짜 아이돌'이라는 자조적 선언은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된 고백이 된다. 그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고백이 오히려 그들을 가장 현실적이고 진정성 있게 만든다. 그들의 <Discord>가 "딱 하나만 물어볼게 넌 / 완벽이란 게 있다고 생각해?"라는 라인으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QWER의 <Discord> 뮤직비디오. 출처: QWER 공식 유튜브

 

이 노래는 마치 청중에게 묻는 듯 하다. '완료형'의 음악이 아닌, '진행형'의 음악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이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제안이다. 시간을 움직임으로 체험하자는 제안, 도달해야 할 종착점이 아닌 여정 자체의 풍요로움을 느껴보자는 초대장이다.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시퀀스처럼, 청년들의 삶은 '만약에'의 연속이다. 이루어질 수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들이 꿈틀거리는 공간. 확정된 결말보다 가능성의 역동적 운동 자체에 가치를 두는 세계. QWER의 음악은 그런 세계의 원리를 담고 있다.

 

"가짜라고 놀려대도 / 기필코 너에게 진심을 전할게" 이 구절은 주어진 조건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다. QWER이 '가짜 아이돌'에서 진짜 밴드로 변모해 가는 과정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지만, 그 '다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나의 본질이 있다는 메시지다.


<나는 반딧불> - "멈춰진 순간의 빛"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 뮤직비디오. 출처: 유튜브 '황가람과 동네청년'

 

반면, <나는 반딧불>은 직관이 포착한 순수한 시간의 노래다. 2020년 인디밴드 중식이의 노래로 처음 발표된 이 곡은 2024년 황가람의 리메이크로 다시 태어나며 일종의 시간적 저항, 즉 살아있는 기억이 현재와 다시 마주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이 가사는 '진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삶의 도약’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겠다는 선언이다. QWER이 ‘가짜 아이돌’에서 “알고리즘에서 태어나 색안경 위로 꽃을 피우자”라며 세상이 규정한 ‘가짜 아이돌’이라는 꼬리표를 역설적으로 받아들이듯, ‘나는 반딧불’도 ‘별이 아닌 벌레’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는다. 벌레임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빛날 수 있다는, 시간의 초월적 역설이다.

 

이 노래는 ‘실패한 자들의 송가’가 아니라 '다른 성공을 정의하는 노래', 즉 내적 시간의 승리를 노래한다. 황가람은 무명 14년 끝에 이 노래로 인정받았고, 원곡자는 "네가 잘돼야 내가 먹고 산다"며 그 여정을 축복했다. "얼마쯤에 내 꿈이 포기가 될까"라는 절망에서 "그래도 괜찮아 우린 빛날 테니까"라는 희망으로의 전환은, 노래 속 진정한 지속과 현실의 지속이 교차하는 감동적인 순간이다.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을 맛보는 순간처럼, 이 노래는 시간의 다층성을 일깨운다. 황가람이 무명 가수였던 시절의 기억, 원곡자가 이 노래를 처음 썼을 때의 감정, 그리고 이 노래를 듣는 청자의 각기 다른 시간들이 한 순간에 교차한다. 이는 베르그송이 말한 '순수 지속'의 경험이다. 시간이 공간화되지 않고, 순수한 질적 경험으로 체험되는 순간이다.

MBC '놀면 뭐하니?'에서 <나는 반딧불>을 부르는 황가람. 출처: MBC

 

"그래서 나는 넓은 세상 속에 갇혀 있었네요 / 새장의 새처럼 자유로울 수 없었죠" 이 역설적인 표현은 현대인의 모순된 상황을 정확히 포착한다. 무한한 선택지와 가능성 속에서 오히려 더 큰 갈등과 고립을 느끼는 아이러니. 그러나 <나는 반딧불>은 이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빛을 발견한다. 이는 파스칼이 말한 '내면적 자아'의 발견과도 맞닿아 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김혜자는 말한다. "별일 없이 사는 삶도, 충분히 위대하다." 이 담담한 문장은 <나는 반딧불>이 전하는 메시지와도 정확히 겹쳐진다. 도착지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빛나는 일임을.

 

황가람의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떨림은 단순한 기술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14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감정적 깊이, 오랜 기다림 끝에 피어난 인내의 흔적이다. 그 떨림 하나에도 시간이 담겨 있다. 이는 우리에게 말한다.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도 빛날 수 있다고.


"균열된 시간 속 춤추기"

이 두 노래가 공존하는 것은 2025년 한국 사회의 분열된 시간성을 반영한다. <매트릭스>의 '블루필'과 '레드필'처럼, 두 가지 다른 시간 인식론이 공존한다. 하나는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공간화된 시간, 다른 하나는 하나의 순간 속에 영원을 담는 순수 지속의 시간.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청년들을 이런 시간 구조 속에 가두는 조건은 무엇인가?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간을 분절화하고 지수화한다.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현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주거비용, 사라진 계급 상승의 사다리. 이 구조가 청년들에게 '달리되 제자리'인 시간, 공간화된 시간의 감옥을 강요한다.

 

한국 사회의 청년들이 처한 시간적 딜레마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다. '일터에서는 빨리빨리, 집에서는 늘어지는 시간'. 출퇴근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업무 강도는 높아지며,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은 줄어든다. 하루가 24시간인 것은 모두에게 동일하지만, 그 24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계급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시간의 계급화'는 현대 사회의 가장 은밀한 차별이다. 부유층은 자신의 시간을 통제할 권리를 가진다. 그들은 스케줄을 조정하고, 휴가를 떠나고, 자기 계발에 투자할 여유가 있다.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호출형 근무'로 인해 언제 일을 해야 할지 예측할 수 없고, 쉬는 시간조차 마음 놓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이는 시간의 자율성, 즉 시간 주권의 문제다.

좌측부터: 20대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 / 서울 1인 청년가구 주거빈곤율 추이. 출처: 한겨레

 

QWER과 <나는 반딧불>은 이러한 모순을 각자의 방식으로 포착했다. QWER은 "약속해 영원히 잡은 손 놓지 않을 테니까"라며 달리게 하면서도 그 달림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는 반딧불>"지금 여기서도 빛날 수 있어"라며 현재의 풍요로움을 일깨운다. 청년들은 이 두 노래 사이를 오가며, 자신만의 진정한 시간 감각을 조율한다. 두 노래의 공존은 '혁명과 순응'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이것은 더 복잡한 시간의 정치학이다. 즉, QWER의 노래가 체제 내에서의 저항이라면, <나는 반딧불>은 체제에 대한 초월적 저항이다. 전자가 '달리는 방법을 바꾸자'라고 제안한다면, 후자는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흥미로운 것은, 청년들이 이 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는 점이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처럼 벽을 파는 시간과,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처럼 책상 위에 올라 다른 관점을 보는 시간, 이 둘이 하나의 플레이리스트 안에 공존한다. "세상은 내 안에서 그 의미를 찾고, 나는 세상 속에서 나의 영혼을 찾는다."라고 말한 시인 타고르처럼 우리는 바깥의 시간과 내면의 시간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그 진동이 만들어내는 파장 자체가 우리의 존재를 구성한다.


"우리라는 별자리"

이 두 음악은 서로 다른 시간을 노래하지만, 공통된 메시지를 갖는다. 바로 '우리'라는 말이다. QWER의 <청춘서약> 속 "약속해 영원히 잡은 손 놓지 않을 테니까 / 햇살이 머무는 이곳에서 우리 함께하자"나, 황가람과 원곡자가 함께 부른 "그래도 괜찮아 우린 빛날 테니까"라는 가사는 모두 공동체를 호명한다. '우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파편화된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방식이 열린 사회라는 인식 때문이다. 김도현이 "인터넷의 우주는 공허하고 영원한 시간의 망망대해"라고 표현했듯, 현대 사회는 취향만을 집요하게 공략하며 더 많은 중독을 창출하는 파편화된 개인주의로 가득하다. 그 속에서 '함께'라는 말은 가장 급진적인 언어가 된다.

 

'우리'라는 단어는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고립된 개인이 아닌, 서로 연결된 개인들의 연대를 강조하는 단어다. QWER이 말하는 '우리'는 단순한 팬덤 공동체를 넘어선다. 그것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함께 항해하는 동료들, 동시대성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의 연대를 의미한다. 아렌트는 정치적 행위는 언제나 '함께함' 속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고립된 개인은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오직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치적 행위가 가능하다. QWER과 <나는 반딧불>이 '우리'를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QWER은 인플루언서 출신들이 모여 밴드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같이에서 오는 책임감과 서로에 대한 믿음, 다 같이에 대한 설득과 결국 우리가 될 거라는 다짐을 실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황가람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벌레지만, 함께일 때 우리는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빛날 수 있다.

 

정치가 귀 기울여야 할 지점도 바로 이 곳이다. 단순한 정책 나열이 아닌 '함께'라는 감각의 회복, 열린 사회의 비전이 청년의 마음을 움직인다.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 같은 고민은 복지의 문제 이전에 '시간의 주권' 즉 질적 시간을 회복하려는 싸움이며, 청년에게 자기 속도의 삶을 되찾게 하는 상상이다. 지금 정치의 핵심은 바로 이 '시간 정치학'에 있다. 시간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다. 불안정 노동으로 인해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상황,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인해 공동체적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현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박탈이다.

 

오늘날 진보정당이 지향해야 할 핵심 가치는 바로 이 '시간 주권'의 회복이다. 우리가 꿈꾼 이상사회는 단순한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 '오전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비평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자유였다. 노회찬 전 의원의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는 나라" 역시 바로 이런 사회를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계급 없는 사회'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에서 소외되지 않고 그 시간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는 사회. 이들의 성공 서사는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처럼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혼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함께라면 가능해진다는 메시지 말이다.

좌측부터: 첼로를 켜는 노회찬 전 의원 /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출처: 노회찬재단 / IMDB

 


"그래도 괜찮아, 우린 빛날 테니까"

QWER과 <나는 반딧불>은 단순한 K-POP 현상이 아니다. 그들은 현대 한국 사회의 시간적 모순과 그 초월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화적 증상이다. '도착하지 않는 운동'과 '멈춰선 순간의 빛', 이 둘의 공존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실체다. 기존 K-POP이 완벽함, 도달해야 할 정점을 향한 끊임없는 상승 곡선을 그린다면, QWER와 <나는 반딧불>은 불완전함의 미학을 제시한다. 전자가 "성공한 사람들이 되자"고 말한다면, 후자는 "지금 여기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음악적 차이가 아니라, 삶의 철학적 태도의 차이다.

 

QWER과 <나는 반딧불>이 다루는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어긋난다. 그러나 그 어긋남이 오히려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달리는 시간과 머무는 시간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 시간. 지속과 직관이 조화를 이루는 시간. 혼자서는 별이 될 수 없지만, 함께라면 별자리가 되는 시간.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열린 사회의 시간 미학이다. 각자의 속도로 살아갈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 멈춰 설 권리와 달려갈 권리가 동시에 존중받는 사회. 시간의 동질화가 아닌, 시간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 '시간의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시간이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구성되는 사회. 그것은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구체적 정책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는 '시간의 감각' 자체를 바꾸는 혁명을 필요로 한다.

QWER <가짜 아이돌>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출처: QWER 공식 유튜브

 

QWER과 <나는 반딧불>은 이 시대의 아이콘이 아니다. 그들은 현대 시간성의 증상이다. 그들이 노래하는 시간의 두 얼굴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삶의 모순이다. 그리고 그 모순을 인정하는 순간, 창조적 진화가 가능해진다. QWER이 '가짜 아이돌'에서 "알고리즘에서 태어나 색안경 위로 꽃을 피우자"라고 노래하듯, 우리의 삶도 제약과 한계 속에서 자신만의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래도 괜찮아 우린 빛날 테니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아름다웠던 시간. 살아있는 기억으로 남아 현재에 개입하는 과거의 아름다움. 우리의 청춘도 그러하지 않을까. 도달하지 못해도, 빛나지 못해도, 그 여정과 순간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정치란, 삶의 도약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 그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약속일지도 모른다. QWER의 "기필코 너에게 진심을 전할게"라는 약속처럼.


왕복근

현 정의당 관악구위원회 위원장.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본부 조직국장으로 노조에서도 일하고 있다.
청년 인구만 40%가 넘는 관악구에서 지방선거에 출마해 왔고, 청년들의 일상적인 삶을 지역에서부터 변화시킬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