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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 일반

문제는 노동자 건강권이다: '과로의 낙인'을 끝내자

by Domoleft 2025. 2. 19.

[사회] 문제는 노동자 건강권이다: '과로의 낙인'을 끝내자

주 52시간제 적용 예외라는 '논쟁' 속에서, '위기'가 도래할 때마다 볼모로 잡히는 노동자 건강권의 문제는 도외시되고 있다. 정치와 재계가 한국 노동자들에게 찍는 '과로의 낙인'을 비정규직 활동가의 입장에서 진단한다.


'산업 위기'의 볼모가 된 노동자 건강권

2024년 2월 3일 국회에서 열린 반도체특별법 주 52시간 제외 관련 토론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월 1천만 원 이상을 받는 고도의 전문 연구자에 대해서만, 그리고 본인이 동의하는 조건이라면, 총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기에 집중하는 정도의 유연성을 부여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냐"고 발언했다. 이후 민주당은 최종적으로 반도체특별법에서 주52시간 예외 조항을 빼는 방향으로 선회했지만[각주:1], 여전히 '주52시간은 별도로 다룰 수 있다'며 여지를 열어 놓고 있다. 그러나 특정 직군 및 조건에서의 예외를 허용하는 논리는 결과적으로 폭넓은 직군에 있어서의 규제 완화 출발점이 될 위험이 있고, 이는 곧 한국 사회 노동자 건강권의 전방위적 퇴보와도 직결되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의 2021년 연구에 따르면 주 55시간 이상 노동 시 뇌졸중 위험은 35%, 심장병 위험은 17% 증가한다.[각주:2] 더불어 총 노동시간의 증가 문제도 있지만,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 그 자체로 노동자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장시간 노동은 생체 리듬을 무너뜨리고 정신 건강 악화우울증수면 부족 등의 문제를 야기한다따라서 단순히 '노동시간 단축'의 차원을 넘어 불규칙하거나 탄력적인 근무 형태가 노동자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노동시간 규제는 노동자의 건강권과 사회적 안전망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주 55시간 이상 노동 시 뇌졸중 위험 35% 증가. 출처: ILO

 

이재명 대표는 과거 경기도지사 시절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52시간제의 강화를 주장한 바 있다그러나 계엄 이후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면서 재계와의 접점을 넓히는 과정에서 유연근무제와 노동시간 조정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빈도가 늘어난 것이다. 재계는 최근 삼성전자가 미국 엔비디아(NVIDIA)의 반도체 납품 심사에 탈락하고, 대만 TSMC 등의 후발주자들이 시장에서 빠르게 치고 올라오며 삼성과 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주 52시간제 적용 예외의 근거로 주장해 왔으며, 민주당의 입장 선회 후에는 경제부총리 출신의 최상목 권한대행과 국민의힘 역시 "노조에 굴복한 민주당이 산업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며 재계의 비난에 가세하고 있다.

 

지난 2024년 12월, 삼성전자는 더불어민주당 관계자와 진행한 면담에서 "대만 TSMC 연구개발팀은 주 7~80시간을 일해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며 주 52시간제 제외를 요구하는 로비를 진행했음이 한겨레 기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각주:3] 그러나 이는 대만 노동법상으로도 불법인 사항으로 TSMC는 이 주장을 부인했으며, 대만 전자산업노조는 이러한 주장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한겨레의 질문에 "대만은 TSMC 때문에 노동법을 바꾸지 않았다"며 "정부와 기업이 떨어진 자신들의 경쟁력을 근로시간 탓으로 돌리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전자산업노조에 따르면 2011년 HTC사의 엔지니어가 과로로 숨진 이후 대만에서는 근로시간 한도 적용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각주:4]

 

과거 한국에서도 노동시간 규제에 있어 폭넓게 적용되었던 이러한 '예외'는 참담한 결과를 흔히 빚어내곤 했다. 특히 IT 업계·게임 업계 등 특정 직군에서의 예외가 남용되면서 만성적인 초과노동과 과로사가 발생했다. 2017년 넷마블 20대 노동자의 과로사 사례는 노동시간 예외 허용이 노동자의 삶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각주:5] 해외에서도 노동시간 완화 정책 도입 후 노동환경이 악화된 경우가 많다특히 과거 1980년대 버블경제 당시 대두되었던 일본의 가로시(過労死과로사)’ 문제는 노동시간 규제 없이 방치될 때 발생할 수 있는 극단적 위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018년 과로로 사망하여 산업재해를 인정받은 넷마블 노동자. 출처: KBS 뉴스


한국 노동법의 함정, '공짜 노동'과 감단직

소위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과 한국의 노동시간을 비교해 볼 때 이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2021년 기준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1,915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16시간보다 약 200시간 더 많았다. OECD 주요 국가들의 연간 노동시간과 관련 정책들을 함께 살펴보자.

 

- 독일: 연간 노동시간 1,349시간. 1994년부터 금속·전기 산업을 중심으로 주 35시간제를 도입해 노동시간 단축과 생산성 향상을 동시에 달성했다. ‘시간 계좌제’를 운영해 특정 기간 근로시간을 조정하되, 전체 노동시간이 법적 한도를 초과하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한다.

 

- 프랑스: 연간 노동시간 1,402시간. 2000년 ‘오브리 법’을 통해 법정 노동시간을 주 35시간으로 제한했다. 예외적으로 초과노동을 인정할 경우 노동자에게 추가 보상을 지급해야 하며, 이는 근무시간 단축과 고용 증가로 이어졌다.

 

- 일본: 연간 노동시간 1,607시간. 2019년 ‘근로방식 개혁’으로 초과근무 상한을 설정했지만, 기업 문화와 현실적인 노동환경 제약으로 실질적 효과는 미흡하다. 특히 ‘가로시(과로사)’ 문제는 노동시간 규제 완화로 인한 위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015년 전기회사 신입사원이 한 달간 105시간의 초과근무 끝에 자살한 사건 이후 일본 정부가 대책을 내놓았으나, 여전히 실효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 벨기에: 연간 노동시간 1,550시간. 2022년 주 4일제 선택제를 도입해 노동자가 5일 근무 대신 하루를 추가 휴무로 전환할 수 있도록 했다. 기업 생산성과 노동자의 피로도 사이에서 절충을 시도한 정책이지만, 노동계는 추가적인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OECD 주요 국가들의 노동시간 비교 (2021년 기준). 출처: 매일노동뉴스

 

한편 한국은 법정 노동시간 자체도 길지만, 직장에서 보내는 실질적 체류 시간은 훨씬 더 긴 나라에 속한다. 명시적인 연장근로가 없더라도 일찍 출근해 업무를 준비하거나 퇴근시간 후에도 회사에 남아 있어야 하는 관행 때문에 실제 근무 시간이 훨씬 늘어난다. 법정 노동시간이 하루 8시간이어도 점심시간(1시간)과 추가 업무 등을 포함하면 사실상 9~10시간 이상 직장에 머무르기 일쑤다. 이러한 장시간 노동 관행에 휴게 시간까지 결합되면서 노동자의 직장 내 체류 시간은 통계보다 훨씬 길어질 수밖에 없다.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노동시간 규제가 엄격한 국가에서는 장시간 노동을 제도적으로 강요하기 어렵지만, 한국에서는 ‘공짜 노동’이 관행화된 구조가 문제다. 예를 들면 '감시·단속직 근로자(감단직)'의 경우를 통해 극단화된 공짜 노동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경비원, 건물 관리인 등 감단직으로 분류되면 법정 근로시간 제한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하면서도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겉보기에는 휴게시간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직장에 상주하며 업무 대기를 해야 해 실질적 체류 시간만 늘어나는 구조가 된다. 이는 결국 감단직 노동자의 노동 강도를 높이고 불안정한 근무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재계와 함께 한국 반도체산업의 위기를 우려하는 이재명 대표와 최상목 권한대행은, 과연 '일 근무 2시간짜리 근로계약서의 감단직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알고는 있을까?

지난 2022년 대선 당시 경총과 기업 총수들을 만난 이재명 대표. 출처: 연합뉴스


'과로의 낙인'을 찍는 정치를 끝내야 한다

이재명 대표의 발언은 노동시간 규제 완화를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해 결과적으로 노동자 보호를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흐름을 만든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서도 근골격계 부담작업 노동자의 근무시간을 주 34시간, 일 6시간 이내로 제한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과로와 그로 인한 죽음이 지속된다. 흔히 '노가다'라고 불리우는 건설현장 직종, 택배 상하차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이 논의는 이제 단순히 '법정 노동시간'을 다루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한국은 이미 법정 노동시간이 충분히 길 뿐 아니라, 상술했듯이 기업 관행 때문에 실제 체류시간이 더 길어지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한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문제제기가 함께 필요하다.

 

노동시간 단축 정책이 실질적 효과를 만들어내려면 기업이 노동자의 과로를 '비용 절감 수단'으로 삼지 못하도록 강제하면서, 동시에 노동자들의 직장 내 체류시간까지 줄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기업이 노동시간을 형식적으로 줄이면서 무급 휴게시간만 늘린다면, 노동자들이 직장에 머무르는 시간은 줄어들지 않아 실질적인 개선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유급 휴게시간 제도를 도입·확대하고 기업이 노동자들의 건강을 볼모로 삼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들은 노동자들이 어떤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지 진실로 알고 있을까? WHO와 ILO의 연구가 보여 주듯이, 장시간 노동은 생명에 치명적 타격을 입히는 뇌졸중과 심장병 위험을 크게 증가시킨다. AI로 대표되는 신산업이 노동자들의 삶 자체를 흔들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정치가 노동시간 규제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을 논의해야 할 때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중.

 

2016년 개봉한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배트맨은 자신이 잡은 범죄자들에게 이른바 '정의의 낙인'을 찍으며, 그들이 어떤 일을 당하든 개입하지 않겠다 선언한다. 영화 내에서 낙인이 찍힌 자들이 극악무도한 범죄자인 것과는 별개로, 이는 결과적으로 이들에 대한 또 하나의 범죄를 조장하고 묵인하는 것과 같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동시간 규제 완화'가 논의되는 방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발언은 노동자를 보호해야 할 제도를 흔들어 노동자의 건강과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

 

반도체특별법에 있어서의 주 52시간제 예외는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압박을 통해 우선 철회되었지만, '위기'를 핑계로 노동자의 삶과 건강을 가장 먼저 볼모로 잡는 정치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에게 '과로의 낙인'을 찍는 정치를 이제는 끝내야만 한다.


김성은

비정규직 노동운동 활동가.

어디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지만, 멈춰서야 할 때는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주

  1. '52시간 예외' 조항 뺀 민주당…이재명 "반도체법 불발 국힘 탓"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50217/131042060/2 [본문으로]
  2. Long working hours can increase deaths from heart disease and stroke, say ILO and WHO https://www.ilo.org/resource/news/long-working-hours-can-increase-deaths-heart-disease-and-stroke-say-ilo-and [본문으로]
  3. 삼성, TSMC '노동법 위반' 근거로 반도체특별법 통과 주장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172293.html [본문으로]
  4. 대만 전자산업노조 "한국 반도체특별법 반대...기업 경쟁력 약화를 근로시간 탓"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174591.html [본문으로]
  5. '크런치 모드'로 과로사한 넷마블노동자...산재 첫 인정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805357.htm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