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세무사 김봉독의 경제 화젯거리 톺아보기
미환류소득 법인세로 알아보는 부유세의 현실적 가능성
거대 양당의 '부자감세연대'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 진보좌파들은 흔히 부자증세와 부유세 도입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곤 한다. 그런데 부자증세는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현재 존재하는 '미환류소득 법인세'로부터 그 가능성을 알아보자.
대통령이 만든 세수 펑크가 복지 축소로 이어지고, 거리에서는 반정부 투사가 따로 없는 거대 야당조차 국회에서는 대책 없는 부자감세연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고물가와 인플레이션 속에 비극이 연달아 이어지는 지금, 진보좌파는 대안으로 흔히 부유세의 도입, 즉 부자증세를 외치곤 합니다. 얼마 전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의 진보 3당은 '감세 정국에서 부유세 도입을 말하다' 토론회를 함께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부자증세를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본 적 있으신가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부유세'로 보느냐의 정의는 다양하겠지만, 대한민국에 존재한 세금 중 부유세에 그나마 가까웠던 세금은 '미환류소득 법인세'가 아닐까 합니다. 이는 2010년대 초반 정치권을 달궜던 사내유보금 이슈와 연관이 있습니다. 사내유보금은 사실 그저 '회계상 이익의 누적액'일 뿐이지만, 시민들이 기업에 대해 느낀 박탈감이 컸기 때문에 사내유보금이 화두에 올랐죠. 이에 당시 여야가 합의해 소위 말하는 '미환류소득에 대한 법인세'(이하 미환류소득 법인세)가 탄생했으나, 이 역시도 현재 윤석열 정부의 부자감세로 인해 폐지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환류소득 법인세가 무엇이고 어떻게 탄생한 세금인지, 그리고 나아갈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으로 미환류소득 법인세에 대해 소개하기 전에, 우선 사내유보금과 법인세의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사내유보금이라고 하면 흔히 기업에 쌓인 현찰을 생각합니다. 이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흔히 퍼져 있던 오해입니다. 하지만 사내유보금은 비상금이나 여유금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내유보금은 회사 설립 이래 쌓은 순이익의 누계액, 그 중에서도 배당하지 않은 금액을 뜻합니다. ‘순이익의 누계액’은 현금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장치, 건물, 자동차 등 다양한 자산으로 기업 내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사내유보금을 싹 다 시민에게 돌려줘라’는 말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내유보금을 모두 환수하려면 기업을 청산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시민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사내유보금 이슈에서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순이익의 누계액을 투자와 배당, 상생 등에 쓰지 않고 돈놀이, 비자금 조성, 횡령 등에 쓰며 소수를 위해 향유한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인세는 무엇일까요? 법인세는 이익, 즉 기업 등이 번 돈에서 가져가는 세금입니다. 세계 각국의 법인세율은 보통 (개인)소득세율보다 낮기 때문에, 기업 오너는 소득세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본인에게 이익을 배당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가져가는 꼼수를 쓰기도 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에서는 법인세에 추가로 유보이익세(Accumulated Earnings Tax)를 만들었습니다. 미국 내에서는 이 세금에 대해 이중과세라는, 즉 같은 소득에 부당히 두 번 과세한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미국 국세청은 이를 징벌적인 세금으로 규정하며 일축했습니다.
한국의 미환류소득 법인세(정식명칭 ‘투자상생협력촉진세제’)는 이 사내유보금 이슈에 응답하여 상술한 미국의 유보이익세를 기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유보이익세는 지급한 배당만을 이익에서 차감해 과세하는 데 반해, 한국의 미환류소득 법인세는 투자나 임금증가와 같은 상생 항목도 추가로 차감한 뒤 과세하는 등 덜 엄격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직원에게 급여를 많이 주면 해당 회사에 인센티브를 주던 당시 일본의 아베노믹스에서 모방한 요소들도 미환류소득 법인세에 존재합니다. 당시 정치권이 ‘사내유보금 과세를 통한 분배’라는 시민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두려워해 자본주의 강대국의 조세정책을 벤치마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환류소득 법인세는 배당과 투자, 상생 등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주주자본주의의 아주 당연한 원칙들이지만, 이를 뒤집어 말하면 한국 기업들은 그것조차 꺼려해 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한국 기업이 배당을 적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는 뒤에서도 말씀드릴 이중과세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오너 일가는 순환출자 등으로 인해 지분율이 매우 낮기 때문에, 지분율대로 수익을 나눈다는 배당의 특성상 온전히 배당을 하면 남(소수주주)에게 돈이 '샌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임원으로서 급여도 받고, 일감 몰아주기나 치즈 통행세 같은 편법을 쓰기도 하는 등, 배당 말고도 온전히 오너에게만 기업의 돈을 꽂아줄 수 있는 방법도 많이 있습니다. 즉, 기업을 오너의 사유재산으로 생각하는 한국식 사고방식으로는 배당을 많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한국의 대기업은 배당을 꺼려했습니다. 1
다음으로 여태껏 기업들이 투자나 상생에 적극적이지 않아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간단합니다. 투자나 상생을 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하지 않아서 부과되는 페널티가 훨씬 적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장애인고용부담금이 있습니다. 일정 규모 이상인 기업은 장애인을 고용할 의무가 있으나, 이행하지 않는 기업에게는 페널티로 장애인고용부담금이 부과됩니다. 그러나 수많은 기업이 더 값싼 부담금을 택했고, 지난 5년간 신고납부된 장애인고용부담금은 150억 원 가량입니다. 유사한 사례로 작년(2023년) 9월 무신사에서 직장 내 어린이집을 만드는 것보다 벌금이 더 싸다며 의무를 어기고 어린이집 설립 계획을 백지화한 사례, 대한적십자사가 비정규직 부당해고 구제 명령을 받고도 이행강제금 납부로 대신한 사례 2 등이 있습니다. 페널티가 더 커서 강제효과가 존재했다면 한국의 대기업들은 진작에 투자나 상생을 했을 겁니다. 3
'경제가 어렵다는데 기업한테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아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는 지난 2014년 현대차그룹의 한전 부지 인수입니다. 당시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국전력이 전남 나주로 이전됨에 따라 부지 매각이 결정되었습니다. 대기업들이 인수전을 벌인 결과, 현대차그룹이 10조원을 투입하여 매입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현대차그룹의 투입액이 너무 커 재계에서도 당혹스러워했다는 후일담 4이 전해집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제철의 비정규직 김성욱 씨는 "그 돈의 3%만 투자해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이 여유가 없어서 투자, 상생, 배당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의지가 없었을 뿐인 것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상황을 해소하고 배당과 투자, 상생 등을 활성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미환류소득 법인세입니다. 물론 미환류소득 법인세에 대한 갖가지 비판도 존재합니다. 재계 측의 반발로 대표적인 것은 앞서 말씀드린 이중과세 문제입니다. 한국 기업의 배당이 적은 데에는 높게 책정된 (개인) 배당소득세에 법인세까지 부과되는 등 제도적인 문제도 있는데, 미환류소득 법인세는 이미 부과되는 세금에 대한 이중과세라는 논리입니다. 당시 정치권은 이러한 반발을 완화하기 위해 미환류소득 법인세 산정 시 기존 법인세를 차감하거나 임금증가액의 여러 배를 차감하게 하는 등, 이미 해당 세금의 원류인 미국보다 더 관대한 공제 항목을 적용했습니다. 이중과세에 대한 보상책으로 비용 등의 이중공제를 허용해 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는 2024년 지금도 미환류소득 법인세에 대한 폐지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5
반대쪽인 시민사회와 운동진영의 비판으로는 미환류소득 법인세가 정식 명칭인 '투자상생협력촉진세제'와 달리 실질적으로 투자나 상생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존재합니다. 이는 실제 미환류소득 법인세가 등장한 이후로도 미환류 대기업들이 여전히 이익을 투자/상생하는데 쓰는 대신 금융자산이나 부동산 6 등의 형태로 향유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난 국회에서 정의당 등이 여러 차례 '대수술'을 제안하는 등, 국회에서 꾸준히 제도정비의 과정 중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2018년 제도 개편 후 미환류소득 법인세의 입법 취지가 점점 더 효과적으로 달성되어 왔다는 연구 결과 7도 있습니다. 8
현재 윤석열 대통령은 조세정의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기업이 져야 한다는 십여 년간의 국민적 합의를 뒤엎었을 뿐더러, 되려 집권 후 재계 측의 요구만을 수용해 미환류소득 법인세 폐지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양경숙 의원실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 계열사(상호출자제한기업)가 납부한 미환류 소득에 대한 법인세는 무려 2696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2016년의 32배 규모로 늘어난 것으로, 미환류소득 법인세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것은 대기업이 그만큼 상생과 임금 인상, 정규직 전환 등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전히 이렇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미환류소득 법인세마저 폐지한다면 주요 대기업들은 지금보다도 더 상생을 도외시하게 될 뿐입니다.
단순히 세금을 줄인다고 해서 투자나 상생 등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 소위 '낙수효과'가 철저한 허구라는 사실은 이명박 정부 5년을 겪으며 이미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날치기가 아닌 여야 합의로 미환류소득 법인세가 통과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물론 상술한 비판에서 드러나다시피 미환류소득 법인세조차도 대기업과 대자본의 사회적 책임을 추징하는 데에는 충분치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미환류소득 법인세보다도 더 개선되고 더 효과적인 방식의 부유세가 탄생해야 합니다. 무작정 세금을 깎아 주는 묻지 마 부자감세도, '사내유보금 환수' 식의 반지성적 공약도 아닌 세밀한 정책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로, 정의당은 2018년 대기업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현금성 사내유보금에서 발생하는 이자/배당/임대수익에 대해 할증과세하는 세법 개정안을 제시했습니다. 한눈팔아 번 돈, 그 중에서도 일부의 현물자산에 대해서만 세금을 거두자는 것입니다. 또한 녹색정의당은 지난 22대 총선 공약으로 100억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슈퍼리치에 대해 초부유세를 도입하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즉 부자 사이에서도 부자라고 인정받는 9 '슈퍼부자'만을 대상으로 우선 과세하자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온건한 부유세에도 벌벌 떠는 기업가라면 중국 등 외국 자본과의 무한경쟁 시대 속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습니다. 10
주류 자본주의의 입장에서조차, 기업이 투자, 상생 등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편법과 투기를 통한 이익에 한눈을 판다면 필히 사회적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1980년대 일본의 거품경제, 2000년대 초 IT버블,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가 증명합니다. 기업이 사회경제적 책임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막무가내로 고삐를 풀어서 거품을 만드는 윤석열과 민주당식 부자감세는 이미 유통기한 지난 썩은 맥주입니다. 현재의 미환류소득 법인세가 갖는 최소한의 사회적 의의를 지켜나가는 것은 물론, 본격적 부유세 도입을 비롯한 조세체계의 혁신이 다시 한 번 필요합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통해 기업을 챙기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감세를 통해 부자를 챙기는 것은 '다음에' 해도 됩니다. 위기가 장기화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위기가 아니라 뉴 노멀이 됩니다. 고물가와 경제난이 어느새 뉴 노멀이 되어 버린 지금은, 고통받는 서민경제를 먼저 살리기 위해 부유세 도입을 비롯한 조세 혁신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유세는 나쁘고 감세는 좋다는 흑백논리를 깨야 할 뿐더러 우리 스스로도 부유세에 대한 정책적 디테일을 보완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한 미환류소득 법인세를 비롯한 한국과 주변국의 사례들을 참고하고 우리의 상상력을 더해 나간다면 우리는 충분히 현실적이고 우리 사회에 적용 가능한 부유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김봉독
공인회계사, 세무사. 현재 모 회계법인의 세무팀에서 일하고 있다.
<도모>에 "세무사 김봉독의 경제 화젯거리 톺아보기"를 정기 연재 중이다. 조세정의와 진보적 경제정책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세무사지만 여전히 세법은 어렵다.
각주
- ‘치즈 통행세’로 오너 일가 배불렸다…미스터피자 8억 ‘철퇴’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310057996i [본문으로]
- 장애인 고용 회피, “장애인 고용부담금을 더 높여야 합니다” https://www.abl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1716 [본문으로]
- 비정규직 부당해고 20개 공공기관, 구제명령 불구 이행강제금 내고 버텨 https://www.newsis.com/view/NISX20171018_0000120898 [본문으로]
- “땅값이 10조 이상?”…현대차 ’통큰 베팅‘에 재계 ’패닉’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18/2014091803058.html [본문으로]
- "법인세 이중과세 유발 '투자상생협력촉진세' 폐지해야" http://www.taxtimes.co.kr/news/article.html?no=265488 [본문으로]
- 고용·투자 대신 현금 쌓아두는 재벌 계열사들 늘었다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964515.html#cb [본문으로]
- 심상정, “제2의 토지개혁 제안, 토초세는 합헌 법률” https://www.justice21.org/newhome/board/board_view.html?num=140183 [본문으로]
- 尹정부가 없애겠다던 ‘환류세’…기업소득 64%는 ‘투자·임금증가’에 쓰였다 https://m.joseilbo.com/news/view.htm?newsid=466838#_across [본문으로]
- 2018년 정의당 세법 개정안 https://www.justice21.org/newhome/board/board_view.html?num=114527 [본문으로]
- 슈퍼리치는 ‘타고난다’…100억은 있어야 ‘부자’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312190936298217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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