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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도모서재

왜 당신은 기록합니까: <맨발로 도망치다> 서평

by Domoleft 2025. 3. 26.

[도모서재] 왜 당신은 기록합니까: <맨발로 도망치다> 서평

단지 '보고서'로서만이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무슨 의미일까? 오키나와 여성들의 생생한 삶 이야기를 다룬 우에마 요코의 르포 <맨발로 도망치다>, 새롭게 시작하는 '도모서재'에 장태린 정의당 전국위원이 보내 온 첫 번째 서평을 게재한다.


 

당신에게 '오키나와'는 어떤 곳인가.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좌파들이라면)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투쟁의 섬을 떠올릴 것이고, 맑고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테다. 내가 알던 오키나와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군기지가 있고, 그로 인해 산적한 수많은 문제들이 있고, 일본 본토와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것 정도.

 

오늘 소개할 책 <맨발로 도망치다>는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르포다. 저자 우에마 요코(上間陽子)는 오키나와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섬을 떠났다가, 류큐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며 다시 오키나와로 돌아온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아래와 같이 오키나와를 설명한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남쪽 동중국해와 태평양 사이에 위치해 있다. 사계절 내내 해변이 따뜻해 일본, 한국, 중국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산호초 바다는 연둣빛과 물빛이 절묘하게 섞여 코발트블루 색을 띠고 해수면은 은은하게 반짝거린다. 하지만 이 따뜻하고 푸르른 오키나와에는 수많은 폭력이 숨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오키나와 주민의 4분의 1이 전장을 피해 떠돌다 사망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2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미군의 점령 아래 있었고, 일본에 반환된 뒤에도 주일 미군의 80퍼센트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다." (13p)

 

여기까지는 우리도 잘 아는 내용이다. 아름다운 섬의 모습 뒤에는 역사적 아픔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저자는 덧붙인다. "한편, 2016년 오키나와현에서 발표한 아동 빈곤율은 일본 국내 아동 빈곤율의 약 두 배 이상인 30%이며, 2017년 아동 학대 건수는 과거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였다. 가정이라는 밀실에서의 폭력 또한 여전하다." (14p)

사진 좌: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古) 마을에서 미군 기지 공사 트럭을 막아서는 주민들의 모습. 출처: 이도영 / 사진 우: 오키나와현의 아동 40명 중 12명은 빈곤에 시달린다. 출처: www.consortium-okinawa.or.jp


오키나와 속 폭력과 전쟁의 아픔은 시대와 얼굴을 달리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 맨발로 피난해야 했던 시민들이 그러했듯, 지금도 누군가는 빈곤과 폭력, 공적 보호망의 부재 속에서 맨발로 밤거리를 헤맨다. 위기 청소년을 연구해 온 저자는 오키나와의 10대 여성들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 중에서도 폭력을 피해 밤거리를 헤매야 했던, 그리하여 유흥업소에서 일하게 된 청소년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을 만나,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 왔고 어떻게 이 길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연구하면 10대 여성 보호 정책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것이 저자의 첫 생각이었다.

 

그렇게 저자는 1,500일간 오키나와의 10대 여성 여섯 명을 만난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애인과 가족, 혹은 생면부지의 남성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해 맨발로 도망나와 캬바쿠라('캬바레'와 '클럽'의 합성어로, 여성 직원이 손님과 함께 대화하며 술을 마시는 가게)에서 일하게 된 '캬바조(캬바쿠라에서 일하는 여성)' 소녀들이다. 그들은 십 대 중반에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고 있거나, 전 남편(혹은 남자친구)에게 아이를 '빼앗긴' 채 늦은 밤 캬바쿠라에서 일한다.

 

유카는 오빠의 가정폭력을 피해 집을 나가 열여섯 나이에 임신했다가 다시 남편의 폭력을 마주한다. 임신 8개월차, 유카는 길거리로 내몰리고 저자는 유카를 이끌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시청으로 간다. 시청 생활보호 담당자는 "세대 분리가 되어 있지 않아 생활보호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잘라 말한다. 돌아가는 길, 저자는 그 생활보호 담당자를 화장실에서 마주한다. 그는 후배 공무원에게 "나는 있잖아, 공무원 시험 기출 문제집 하나 붙잡고 계속 보고 또 봤어."라며 희희낙락한다.

 

쓰바사의 부모님은 쓰바사가 다섯 살일 때 이혼했다. 언니, 오빠, 쓰바사는 방치됐고 자연스레 '불량 서클'로 흘러들어간다. 중학교 교사들은 "우리는 끝까지 너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아침밥을 챙기고, 경찰서에 동행한다. 동시에 그들은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나를 소중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동시에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는 것은 향후 소녀들의 관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삶은 '기출 문제집'이나 '매뉴얼' 따위에는 나와 있지 않은 이야기다. 반복되고 대물림되고 재생산되지만 그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다.


저자의 원래 목적대로라면 이 글은 '보고서'여야 했다. 피해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묘사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공백을 지적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보고서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소녀들의 삶에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 여자아이들을 향한 폭력을 품은 지긋지긋한 오키나와 거리를 떠나고 싶었던, 그리고 마침내 "고향을 버린" 열다섯의 자신을. 그리고 저자는 이제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현실을 마주하며 오키나와 여자아이들의 삶을 '기록'하겠다 다짐한다. 이 글이 보고서가 아니라 '생활사'인 이유이기도 하다.

<맨발로 도망치다> 20p 중. 출처: 알라딘 e-book

 

저자는 소녀들의 아주 내밀한 이야기를 들으며 4년을 보낸다. 대부분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가끔은 화를 내고 답답해한다. 왜 이들은 끊임없이 폭력을 저지르는 애인에게 그만하라고 소리 한 번 치지 못하는지. 왜 그 지긋지긋한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지. 하지만 저자는 소녀들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가끔 병원 보호자가 되어 주고, 경찰서에 동행하고, 따뜻한 밥을 먹이고, 차 안에서 같이 울고 웃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소녀들이 자신의 힘으로 각자의 보금자리를 다시 짓기까지 함께한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아들을 홀로 키우던 스즈노는 밤에 캬바쿠라에서 일하고 낮에는 간호학교에서 공부해 간호사가 된다. 간호사가 된 스즈노는 매일같이 아들 리오를 만나러 시설에 가고, 리오의 옷을 빨래해 가져다 준다. '보통 사람들에게 당연한 일'을 자신의 아들에게도 해 주고 싶기 때문이다. 쓰바사의 꿈은 요리 학원에 다니는 것이다. 자신은 부모로부터 방치돼 사느라 ‘집밥’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들 유에게는 제대로 된 음식을 해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삶 속 절망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결국 혼자 헤쳐나가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오래도록 가만가만 들을 뿐이다. 그리고 드러내어 보여 준다. 소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다시 글로 읽는 과정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 작업, 그러니까 완결된 글로 고료를 받으며 매체에 기고하는 일을 처음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6년이 지났다. 누군가 내게 "왜 기록 작업을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이라서", "듣고 쓰고 말하지 않으면 잊혀지기 때문에"라 답하곤 했다. 진심이었지만 충분한 답은 아니었다. 가끔은 내가 씀으로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쓰는 일이 내게 맞는지, 굳이 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글이라는 걸 생산해내야 하는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곤 한다. 하지만 내가 그 무엇도 아닌 '긴 호흡을 통한 기록'을 선택한 이유는 기록하는 과정에서만 만날 수 있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긴 호흡에서 볼 때에만 포착할 수 있는 게 있다. …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냐고, 그런 의문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현실을 이겨내는 방식, 삶의 방식은 각기 다르다. 그 방식을 두고 우열이나 정당성을 따질 순 없다. 함부로 비난할 수도 없다. 그 길을 걸어온 자가 선택한 방식이므로. 오직 그 길을 걸어온 자만이 말할 수 있는 영역이므로. ...(중략)... 말로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말을 하지 않았다면, 들어주지 않았다면 그녀들이 겪은 일은 그냥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말을 할 때, 말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줄 때, 들어줄 때, 들을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그때 비로소 현실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일은 듣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지 않을까." (214p, 옮긴이의 말)

 

어쩌면 정치도, 운동도 그렇다. 단지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라는 간명한 도식으로만은 이뤄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관성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용기를 갖자. 오래 들여다보고, 누군가의 삶에 깊이 스며들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현실을 마주하자. 그렇게 차근차근, 하지만 단단하게 만들어지는 변화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치의 모습이 아닐까.


맨발로 도망치다

우에마 요코( 上間陽子) 저

양지연 옮김, 도서출판 마티, 2018

 

 

'도모서재'는 다양한 독자들이 추천하는 수많은 책 속에서 때로는 세상을 꿰뚫는 날카로움을, 때로는 마음을 울리는 연대의 따스함을 찾고자 하는 웹진 <도모>의 도서 리뷰 코너입니다.

'도모서재'에 서평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장태린

정의당 전국위원. 서울 마포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입법노동자, 정당 활동가, 기록자로 지내 왔다. 더 잘 듣고 쓰는 사람이 되고자 대학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있다.